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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국제신문]고무신과 신발 산업의 메카, 부산 2014-10-09 18:34:32
작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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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16> 고무신과 신발 산업의 메카, 부산

  - 金, 고베 고무공장 직공 취업
  - 차별·학대 속에서 기술 익혀 
  - 1926년 수정동에 공장 설립
  - 연간 70만 켤레 생산 대성공

  - 고무원료 수입에 전량 의존
  - 항구인 부산 좋은 조건 갖춰
  - 1960년대 대표 회사 8곳중
  - 국제 삼화 태화 등 6곳 소재

  - 정부의 수출 주도정책 부응
  - 신발 내수넘어 수출 효자로
  - 기업들이 있었던 부산진구
  - 사람들 몰려 유흥가 번창도



               삼화고무 공장에서 여성용 고무신을 제작하는 장면. 부산박물관 제공



 ■검정고무신의 추억
검정고무신을 아시나요. 유명 브랜드 운동화를 좋아하는 청소년에게 묻고 싶은 말이다. 어린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장년기 세대는 검정고무신에 얽힌 추억을 하나쯤 간직하고 산다. 그들에게 검정고무신은 신발 이상의 신발이었다. 도랑을 막아 물고기를 잡을 때 고무신으로 물을 펐고, 쉬는 시간에는 운동장에서 고무신 멀리 차기 놀이를 했다. 고무신이 닳으면 엿장수 아저씨에게 뛰어가서 엿과 바꾸어 먹었다. 모두 똑같은 검은색이었으니 새로 고무신을 사면 먼저 이름부터 써놔야 했다. 학교 운동회에서 달리기할 때는 거추장스러워 고무신을 들고 뛰었던 기억도 있다.

1960~1970년대 고무신은 거의 부산에서 생산돼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무신의 고향이었던 부산은 이후 신발 산업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태화고무의 말표, 동양고무의 기차표, 국제화학의 왕자표 등 내로라하는 신발은 모두 부산에서 생산된 상품이었다. 특히 부산진구 서면 일대는 한국전쟁 이후 신발 공장의 메카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신발 브랜드를 출시했던 곳이다. 서면에 검정고무신의 조각상이나 신발 전시관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는 허투루 들을 이야기가 아니다.


■미투리에서 고무신으로

조선 사람은 짚신과 미투리를 주로 신었다. 가죽과 비단으로 만든 신발은 신분이 높은 양반이나 신을 수 있었다. 식물의 줄기를 재료로 만든 짚신이나 미투리는 거칠 뿐만 아니라 불편했다. 비가 올 때 신는 나막신도 두꺼운 버선을 신지 않으면 발이 아파 멀리 갈 수 없었다. 어린이는 불편한 신발을 신기보다는 맨발로 뛰어놀기 일쑤였다.

이런 조선 사람에게 고무신이 보급된 때는 1910년대 말이었다. 고무신은 고무화, 고무 경제화, 호모화(護謨靴)로 불렸다. 일본에서 수입된 고무신은 부드럽고 질기며, 비가 와도 신을 수 있기에 조선인의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1919년 경성의 종로에는 대륙고무공업소가 세워져 조선에서도 고무신이 자체 생산되기 시작했다.

고무신에 관한 조선인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였다. 고무신 한 켤레 값이 짚신 다섯 켤레 값이었지만 착용감이 좋고 경제적이어서 수요가 폭발적이었다. 당시 한 신문에서는 '작년(1921년) 이래로 고무신이 어찌 잘 팔리는지 경성은 물론이요, 지방 벽촌에서 짚신을 신든 사람까지 필경은 물렁물렁한 고무신을 신게 되었다'고 하였다. 1923년에는 조선에 수입 혹은 생산된 고무신이 1100만 켤레나 되었다. 고무신의 대유행은 필연적으로 짚신, 미투리 등을 제조하는 직공의 몰락을 가져왔다. 실제로 경성에서 전통적 조선신을 만들던 직공 500여 명이 직업을 잃고 실업자가 되어 사회적 문제가 됐다.


■고무계의 패왕, 김영준

1923년 부산에서 처음으로 고무신을 제조하는 일영(日榮)고무공장이 설립된 후, 여러 고무공장이 들어섰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회사는 1926년 김영준이 세운 도변(渡邊)고무공장이다. 김영준은 20대에 적수공권으로 일본 고베의 고무공장에 가서 직공으로 일했다. 그는 차별과 학대 속에서도 고무 원료 배합을 연구하여 독특한 기술을 익혔다. 귀국 후 수정동에 도변고무공장을 설립하고, 직접 기계를 운전하고, 원료를 배합하는 일을 했다. 이 공장을 방문한 손님은 누가 사장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그는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1930년 그의 공장은 직공 200여 명, 연간 70만 켤레를 생산하는 큰 회사로 성장했다. 이를 시기한 부산의 환대(丸大)고무공장은 유사 상표 사용을 구실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김영준은 이에 대응하지 않고, 양 공장을 합병해 문제를 해결하는 기지를 보여줬다.
1920년대 장족의 발전을 한 조선의 고무업계는 1930년 초반부터 진퇴양난의 길에 빠진다. 조선에서 66개의 고무공장이 연간 수요 3000만 켤레의 배가 넘는 6600만 켤레를 생산한 것이다. 생산과잉이 심해지자 일본의 대재벌인 삼정(三井)물산주식회사가 고무의 생산과 판매를 통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고무 시장을 대재벌에 통째로 맡기는 일이었다. 삼정은 남선(南鮮)고무공업협회와 짜고 김영준에게 거액의 권리금을 주면서 회유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고무 가격을 급등시켜 소비자에게 불리한 일임을 알기에 끝까지 반대했다. 김영준은 오히려 전북과 경북에 고무공장을 세우고, 독립 경영을 모색한 덕에 고무계의 패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고무신의 메카가 된 부산

일제의 침략 야욕이 노골화한 1930년대 후반에는 고무 원료 수입이 어려워졌다. 부산 시내의 고무신 상점에서 나막신을 진열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고무신을 눈을 씻고도 찾기 어려워지자 다시 짚신이 유행했다. 수십 년 만에 부산 진시장에는 짚신 경기가 활황을 이뤘다.

고무공업이 재개된 것은 해방 이후였다. 일본인의 귀속재산을 민간에 불하하면서 부산에서도 고무공장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켰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각종 기업이 속속 부산으로 몰렸고, 피란민 유입으로 신발 수요도 덩달아 늘었다. 고무 원료는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탓에 항구 도시 부산은 고무 산업이 성장하기 좋은 입지조건을 가졌다. 부산은 곧 고무신 생산과 신발 산업의 메카로 자리를 잡았다. 1960년대 우리나라 대표적 신발 회사 8개 가운데 국제, 삼화, 태화, 진양, 보생, 동양 등 6개 회사가 부산에 모여 있었다. 당시 이 회사들은 모두 고무신을 생산해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물론이다.

지금은 듣기에 생소한 기업이 되었지만 1960년대 보생고무는 타이어표 고무신으로 유명한 회사였다. 보생고무는 1930년대 일본인이 부전동에 세운 공장으로 고무신을 전문적으로 제조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귀속재산이 불하되자, 보생을 인수한 이동인 사장은 재생고무 사업에 두각을 나타냈다. 보생이 생산한 타이어표 고무신은 질기고 오래 신는 고무신으로 전 국민의 인기를 끌었다. 어르신이 보생고무는 몰라도 타이어표 고무신을 아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고무신을 넘어 운동화로

1962년부터 부산의 고무신도 수출을 시작했다. 1960년대 정부의 수출주도 정책에 부응해 부산의 신발은 내수를 넘어 해외 수출 상품으로 효자 노릇을 했다. 당시 부산이 우리나라 제1의 무역항과 수출도시로 발돋움하는 데 무엇보다 신발 산업이 큰 역할을 했다. 고된 노동과 싸웠던 신발공장 노동자들이야말로 부산의 경제 발전을 이끈 역군이었다.

부산의 신발회사들은 고무신을 넘어 새로운 상품을 개발했다. 합성고무에 천을 입혀 만든 학생 운동화를 생산했고, 가볍고 편한 합성 피혁 신발인 케미컬 슈즈도 출시했다. 새로운 신발이 크게 히트하면서 동양고무, 삼화고무, 국제화학 등은 우리나라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기업들이 있었던 부산진구 일대는 신발 산업의 호황으로 사람이 몰려들었고, 유흥가도 크게 번창했다.


하지만 끝없이 영화를 누리는 산업은 없었다. 1990년대 부산의 신발산업은 내림세로 접어들었고, 번창했던 회사들도 신발 생산을 중단했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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